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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들기 전부터 사타는 홀로 있을 때면 종종 제가 누울 관을 떠올렸다. 어려서부터 성정이 음침했던 것은 아니고, 이 취미를 가지게 된 연유를 따져보자면 어머니의 장례식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특출난 구석도 모난 구석도 없던 병약한 귀비는 딸 하나를 낳고 요절했다. 지병 외에 달리 무엇이 세상에 원한 하나 진 적 없는 귀비를 저승으로 이끌었겠는가? 그리하여 마침내 그가 숨을 거두는 날에도 수희전은 고요했다. 독살도 아니요, 암살도 아니요, 냉궁에 유폐되는 일도 없이 제 처소에서 눈 감았으니 실로 황가의 호상이로다. 그 사실에 사타는 훌쩍거리면서도 이내 조문객의 면면을 살필 수 있었다. 익히 얼굴을 익힌 황실의 어른들도,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이들도 각기 예를 차리고 떠난 이를 애도했다. 마음씨가 고운 이였으니 내세에서도 큰 복을 받을 것이라며 이미 떠난 이는 들을 수 없는 위로가 오갔다. 황실의 여인이 아닌, 어느 여염집 부인의 상을 치른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넓지 않은 관에 가지런히 누운 여인은 파리하게 평안해, 제 죽음이 어떤 소란도 풍파도 부르지 않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장례 행렬이 선산으로 향한 날, 사타에게는 한 가지 바람이 생겼다.
짓궂게 괴롭힐 요량으로 시종들에게 저의 장례식은 어떨 것 같으냐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정말 궁금하기도 했거니와 여러 사람의 다짐으로 쌓아올린 확신이 필요했다. 내가 죽은 다음은 어떨 것 같아? 어머님이랑 비슷할까? 아연한 낯으로 말을 돌리는 이들도 있었고 일단은 공주의 명이니 차근차근 고하는 이들도 있었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사타의 품계가 같으니 사타의 장례식은 꼭 그만큼 화려할 것이다. 흠난 데 없는 오동나무를 곱게 다듬어 옻칠을 한 관 위로는 보통 국화와 모란, 어쩌면 그 대신 사타가 제일 좋아하는 꽃을 빼곡하게 새길 것이고, 산 이들은 삼베로 관을 쓰고 저고리를 해 입어도 사타는 눈처럼 흰 비단 위에 눕게 되리라. 막연한 상상이 한층 구체적으로 형태를 갖추어 가는 일은 좋았지만, 궁인들에게 일찍 어머니를 여읜 공주가 수심에 잠겨 죽을 날만을 기다린다는 오해를 심어주는 것은 바라던 일이 아니었다. 설난이 부쩍 물가에 갈라 치면 저를 꼭 붙드는 것을 보고 사타는 아랫것들을 곤란케 하는 질문을 그만두었다. 사실이야 어찌 되었건 사타에게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새어나가면 가장 곤경에 처하는 이들이 아니던가. 굳이 다른 이가 저를 염려하게 만드는 상황도 싫었거니와, 동정 어린 얼굴로 들여다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차다.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해서 사타가 버릇을 고친 것은 아니었다. 시간은 많지만 찾는 이는 적은 이에게 공상만큼 손쉬운 취미가 있을까. 언젠가, 나이 들어 눈을 감으면 그 곁은 사랑하는 가족과 친우로 빼곡하겠지. 상상 속에서 지금 아는 얼굴과 아직 모르는 얼굴들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그 죽음을 바라는 사람도, 그로 인해 화를 입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옥에 갇히는 사람도, 식솔을 잃는 사람도, 한밤중에 자객이 찾아드는 사람도, 목을 맨 채 발견되는 사람도…. 지리하고 평범한 최후라면 또 어떤가. 남의 위에 태어난 이들에게는 그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일이 다반사인 것을. 그러한 끝을 그리는 일은 그러한 삶을 바라는 것과 같아, 사타는 어머니의 얼굴이 흐릿해질수록 그 위에 적막처럼 내려앉았던 평화를 조문인 양 덧씌웠다. 제 마지막도 어머니와 같이 안온하기를. 그 최후도 꼭 한 사람의 무게만을 가지기를. 바람이 불지 않아도 희미한 연꽃 향에 감싸인 못가 정자의 기둥에 머리를 기대곤 저는 보지 못할 미래를 그리는 시간을 사타는 좋아했다. 한낮의 볕이 그림자를 길게 끌며 잦아든다. 음습하게 찾는 위안이라면 또 어떠랴. 어느 날 갑자기 황후 소생으로 입적된다거나 하는 허무맹랑한 망상에 시간을 쏟는 것보다는 건설적이리라. 일단 그 쪽은 시작부터가 난관이다. 황후가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차라리 그보다는 숙비나 현비 쪽이 낫겠지. 현비가 수희전의 후원으로 찾아와 사타를 찾는다. 아니, 본인이 올 이유가 있나. 보낸다면 진 태감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여기까지 오려고 할까. 그러니 아마도 장주가….
물론 누구도 찾아오는 이는 없다. 그리 된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이제는 발소리만 들어도 구분할 수 있는 궁인들과 후일 금군위장이 되는 이만이 때로 궁을 찾을 뿐이다. 그보다 더한 것을 바란 적 없기 때문에 사타는 저에게 주어진 이 작은 세계가 오래도록 이 모습으로 머물기만을 기도했다. 이곳에서라면 그의 심복이 불퉁하게 굴든, 그런 이에게 목소리를 높이든, 그러다 한바탕 대거리질을 하고서 결국 가지에 걸린 연을 내리려 무등을 타고 나무에 손을 뻗든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귀찮다며 잠든 척 눈을 감고 있는 이의 이마에 보란 듯이 덤불 아래 떨어진 동백을 주워 올리며 사타는 그가 제 장례식에 오지 않는다면 죽어서도 용서하지 않으리라 의미 없는 다짐을 했다. 사타가 그리는 미래에 그의 모습은 단 한 번도 빠진 적 없었다; 때로 설난의 자리가 비어 있는 한은 있어도. 아이를 낳거나 했을 때 무리하면 곤란하니까. 꿈틀거리는 미간을 무시하고 양껏 꽃단장에 열중하던 사타는 곧 손을 멈추었다. 가지런히 누워 눈을 감은 이의 주변으로 붉은 꽃잎을 흩뿌려 두자니, 꼭…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소매를 걷고 꽃송이를 치우다 누운 위로 푹 엎어지자 앓는 소리와 함께 화를 애써 참아 누르는 목소리가 사타를 불렀다. 살아있구나. 수시로 제 마지막을 상상하는 소녀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아래 깔린 이의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당연히 일찍 죽을 생각은 없다. 갑작스레 봉변을 당하고도 끝내 밀치지는 못한 채 입으로만 성을 내는 이 남자의 뒷배를 보아줄 수 있을 정도로는 살고 싶었다.
북녕으로 보내질 화친공주로 명한다는 칙명을 받아든 날, 사타는 설난도 물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정녕 하늘은 그의 편이 아닌 모양이었다. 제 혼처를 스스로 정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니 그에 낙심할 리 있겠는가. 다만 황후가 제 소생을 북녕으로 보내는 데 강경히 반대했다는 소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만치 세상 물정에 어둡지는 않았다. 겁에 질려 늘 하던 생각으로 마음을 진정시키려 해도 눈을 감을 때마다 시커먼 세상에는 피보라가 쳤다. 아직도 나라 안팎으로는 기근이 남긴 흉이 채 가라앉지 않았다. 말발굽이 낮은 울타리를 짓밟고, 강에는 고기 대신 사람 머리가 떠오르고, 자식 잃은 부모와 부모 잃은 자식이 향내 대신 자욱한 연기를 마시며 불타는 거리를 벗은 발로 헤매게 될 것이다. 병풍 뒤로 놓인 관을 덮은 비단과 삼베가 붉게 젖어든다. 뜨뜻하고 축축한 것이 소매를 적시고 기어오르는 감각에 사타는 소스라쳐 눈을 떴다. 엎지른 찻잔에서 흐른 찻물이 소매와 무릎을 둥그렇게 적시고 있었다. 작은 소란에 궁인들이 놀라 공주를 달랬다. 마마, 다치진 않으셨어요. 마마, 북녕에는 겨울마다 눈이 내린대요. 지난 겨울에는 눈 조각을 하지 못해 아쉬워하셨잖아요. 파도가 얼어붙은 모습이 그리 장관이래요. 마마, 북녕왕이 그리 훤칠하대요. 북녕에는 은이 많이 난다니 반지며 비녀가 다 뭐예요. 은사로 짠 이불도 덮으실 수 있을 거예요. 아주 호강하실거예요. 여느 친왕이나 공신보다도 낫지 않겠어요. 마마, 마마. 사타는 그저 제가 누울 관을 떠올렸다. 북녕의 비로 눕게 될까, 남능의 공주로 눕게 될까. 그 관은 누가 짊어지고, 누가 그 위에 엎드려 읍하고, 어디로 향하게 될까. 문제는 그 다음이다.
슬퍼하는 이는 적을 것이요, 성을 내는 이는 정해져 있을 것이라. 팔자 기구한 공주의 설움을 풀어야 한다 성토하는 목소리는 필시 그를 북녕으로 떠민 자들의 것이다. 세를 넓히고 땅을 불리려는 그 손이 사타의 목을 졸랐을 것이다. 두 나라가 붉은 실로 약조를 맺었다. 월하노인의 홍실은 인력으로 끊을 수 없다지만 사람이 엮은 것을 어찌 그에 비하겠는가. 붉은 칠을 한 사타는 맥없이 늘어진 가느다란 실이 되었다. 차라리 여기서 죽는다면 이 모든 일이 없던 것이 될 텐데. 아니면 갑자기 얼굴이 얽어 곰보라도 된다면. 아니면 이 혼사로 국운이 기운다는 점괘라도 내린다면. 아니면 수희전에 불이 나고 알아볼 수도 없는 시신 몇 구만 발견된다면. 사타는 어떤 것도 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도망치고 싶었다. 그 길에 오르는 게 저만 아니라면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사주단자가 도착하기도 전에 달아난다면 혜문씨도 포기하지 않을까. 황명을 거역한 죄인이 되는 일은 두 나라의 평화를 유지하는 대가로는 값싸지 않은가. 언젠가 도피 생활 끝에 황실에서 보낸 추격대의 손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해도….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국혼은 순조로웠고 사타에게 남은 선택지는 매일 밤 부디 북녕왕이 좋은 사람이길 기도하는 것 뿐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면 하늘이 들어 주지 않을까 해서 하루하루 기대치를 낮추었다. 그저 말이 통하는 상대였으면. 적어도 비위를 맞출 수 있는 이라면. 그렇다면 산 사타는 죽은 사타가 하지 못할 일을 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안이한 희망은 능안을 떠나는 순간부터 옅어졌다. 암투에 휘말린 일은 이번이 처음이라 저에게 닥칠 위해와 모략이 북녕 왕궁에 발 디딘 다음에야 시작되리라 착각해버린 것이다. 바퀴가 덜컹거리며 산길의 돌을 마차 바닥에 튀길 때마다 사타의 마음도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살아서 북녕왕을 볼 수 있을까. 그에게 말할 수 있을까. 나를 살려 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전쟁이 날 거예요. 남능에서 저를 욕 보이려 미친 여자를 보냈다 여기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실성했대도 좋으니 이 모든 게 헛된 망상이었으면. 절박한 손은 매달릴 곳 없는 허공을 휘젓다 가라앉았다. 이미 반쯤은 미쳤을지도 모르겠다.
살수가 퍼붓는 화살이 귓가를 스치고 발치에 박혔다. 죽음은 도처에 있었다. 깜빡이는 찰나마다 어둠과 함께 고개를 쳐드는, 이제 그만 두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사타는 기를 쓰고 눈을 부릅떴다. 그 죽음을 기리기 위해 수천 수만의 피로 관을 덮은 비단을 적시도록 죽은 이는 침묵할 것이다. 어떤 말도 해서는 안 되기에 그 자리에 눕게 되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지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손을 잡고 달리던 제러드가 사타를 어깨에 둘러멨다. 죽고 싶지 않아요. 살 자신이 없어요. 발 끝이 벼랑에 닿았다. 죽는 것은 어렵지 않지요. 하늘과 땅이 뒤엉키며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요?
사타는 흰 얼굴로 검은 오동나무 관에 누워 있다; 죽은 이가 어찌 거듭 해를 입겠는가?언제나 죽음 그 자체는 두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려운 것은….
공주님 한 사람의 관으로 해결될 일이라도 그 길을 택하시진 않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달리 말하실 줄 알았지만, 안심했습니다.
잠시 말문이 막혔다.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는 열린 입술은 닫힐 줄도 몰랐다. 무어라 말해야 할까. 내가 그런 사람 같아 보였나요? 사실 이미 한계인 것 같아요? 아니, 애초에 사타 한 사람의 관으로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더라면. 살아서 볼 미래를 감당하지 못해 사타는 망설이고 아쉬워하면서도 기꺼이 숨을 끊었으리라. 현실은 반대다. 관 뚜껑을 열고 소리를 질러도 이미 죽은 사타에게는 닿지 않는다. 그러니 북녕왕은 빈 손에 혼례주 대신 검을 쥐고 산 사람에게 휘두를 것이다. 그 군세가 드높지 않았더라면 황제가 일개 왕국에 친히 화친을 청하는 일이 있었겠는가. 정녕 그 끝은 사타에게만 자명한 것일까? 모닥불에서 비져 나온 불티가 밤공기 사이로 타오르곤 흔적도 없이 사그라드는 소리만이 주변을 감쌌다. 어쩌다 내 죽음에 이토록 많은 사람의 무게가 얹힌 걸까요? 왜 나는 내 어머니처럼 살 수 없는 건가요? 산다는 게 원래 이토록 녹록치 않은 일이었나요? 죽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어떻게 버텨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냥 죽고 싶어요. 내가 실패하면 어떡하죠? 이제 당신은 돌아갈테고, 나는 홀로 저 북쪽의 궁에 남아…. 정제되지 못한 상념이 턱 끝까지 치밀었다 가라앉는 사이, 이 충직하고 농담에는 영 재주가 없는 남자는 너무나 간단히 사타를 믿고 마음 놓고 잠을 청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요. 망설임 없이 제 최후를 바치겠노라 말하는 이에겐 어떤 변명도 필요치 않아 보였다. 그래서 사타는 그를 실망시키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제러드에게 허락된 짧은 안식마저 헤집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지금 제 곁에 있고, 사타는 아직 죽지 못했다. 천천히 눈을 감고 늘 하던 대로 사타는 제가 누울 관을 떠올렸다.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남았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몇 번이고 노력해도 희미한 형체 끝에 피비린내가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당장 우리의 내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고, 운이 좋아야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작별이 고작이다. 서로에게 안녕을 고하기 위해 부르튼 발로 함께 한 치 앞도 모르는 어둠을 헤쳐야 하는 이유를 사타는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그래, 설령 천하를 구한다 한들 이 남자의 믿음을 저버린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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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이디어에 도움을 주신 랜디님 감사합니다 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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